담벼락 속의 추억

매화꽃만 저만치 피어 있다

김창승 시인 | 기사입력 2023/09/11 [10:44]

담벼락 속의 추억

매화꽃만 저만치 피어 있다

김창승 시인 | 입력 : 2023/09/11 [10:44]

"우리 냉천마을이 확 살아 불었다". 회관 앞 담벼락 벽화 그림 작업을 보고 서 있던 제주집 이모님이 흡족해 하시며 하시는 말씀이다.

 

▲ 냉천마을 회관 앞 벽화  © 김창승 시인


옆에 계시던 노인회장 이모님은 '"참말로 자랑스러운 동네였다"라며, "옛날에는 샘 하나로 온 동네가 다 먹고 살았다"고 추억을 길어 올리듯 말씀하신다.

 

▲ 냉천마을 벽화 속 진샘  © 김창승시인

 

그들은 새벽마다 '진샘'으로 불리우는 그 샘가에서 친구들을 만나 인사를 나누고 동네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었다. 중국 진시황제 사신이 불로초를 구하러 지리산으로 왔을 때 이 샘물로 목을 축였다 하여 냉천마을 사람들은 그렇게 부르고 있다.

 

▲ 냉천마을 이모님들  © 김창승 시인

 

담벼락 벽화 그림 속의 아낙네 무리를 손으로 가리키며 이건 나, 이건 점순이, 저건 정숙이, 쩌건 인숙이라 하신다.

 

냉천 이모님들은 금새 70년 전의 풋풋했던 스무 살 모습으로 되돌아가서 아름다웠던 지난 날을 되새기고 있는 것이다.

 

▲ 냉천마을 벽화 속 홍매화  © 김창승 시인

 

며칠 전부터 마을 담벼락에는 홍매가 흐드러지듯 피어나기 시작했다. 한 그루 고목 매화가 함석지붕을 이불 삼아 가지를 마음껏 펼치며 가지 끝마다 붉은 꽃망울을 밝히고 있었다.

 

그 홍매화 낭구(나무)를 기준으로 좌로는 냉천 농악대가 흥겨운 가락을 울리며 희고 긴 상고를 돌리고, 우편으로는 샘가에서 아낙네들이 물을 긷거나 빨래하며 무엇이 그리도 즐거운지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담소를 나눈다.

 

▲ 벽화 속 봄바람을 쫓고 있는 아이들  © 김창승 시인

 

아이들은 낮은 담에 머리를 기대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담장 밖 봄바람을 쫓고 있는 상쾌한 담벼락 그림이다.

 

이름을 날리던 냉천리 농악대는 차쯤 숫자가 적어져 지금은 역전 신촌마을과 같이 팀을 이루고 있다. 간전농악, 용방농악도 있는데 동네마다 정규 인원 30명이 채 안 된다고 하신다.

 

얼마 전 순천 낙안에서 농악대회가 있었는데 그중 냉천 농악대가 제일 잘했지만, 참여 인원수가 부족해서 2등을 받았다며 안타까워 하셨다.

 

10. 2일 노인의날에도 노인 노래자랑이 있는데 갈 사람이 없다고 마을 대표선수를 걱정하고 계시는 냉천 이모님들이시다.

 

"그나저나 너무 사람이 없어, 애기 울음소리 들어본 지 언제인가 싶고, 배부른 사람을 못 본 지도 오래되었다"고 하신다.

 

인근에서는 제일 큰 300여 호의 마을에서 탄생의 일성을 터트리는 아이 울음소리가 끊긴 지 오래되었다는 것이다. 담벼락 그림에서나 아이들을 볼 수 있다니 씁쓸한 웃음이 나왔다.

 

옛날에도 지금도 남녀는 부동석인데 그림 벽화도 부동석이다. 아낙네와 예쁜 각시들은 샘가나 냇가에서 놀고 남정네들은 따로의 공간에서 놀고 계신다.

 

▲ "선상님 이제는 좀 섞어 그려 주세요"  © 김창승 시인


벽화를 그리고 있는 화가들에게 이모님 한 분이 "선상님 이제는 좀섞어 그려 주세요"라고 귀여운 주문을 하신다.

 

냉천마을 담벼락 벽화 그리기는 전라남도의 핵심시책 '청정전남 으뜸마을 만들기 사업'의 일환으로 구례군 90개 마을이 참여하는 △마을 진입로 꽃길 조성 △화단 가꾸기 △마을 안길 벽화 그리기 △쓰레기 분리수거함 설치 △LED 조명 설치 △특색있는 문패와 우체통 제작 등 쾌적하고 살기 좋은 마을로 바꿔나가고 공동체 정신을 회복하는 사업 중의 하나이다.

 

▲ 오토바이를 타고 벽화를 지나는 이모님  © 김창승 시인

 

노인정 창문가에 기대서서 "매화꽃이 참말로 이쁘다" 말씀하시는 냉천 이모님의 얼굴에 모처럼 봄빛이 찾아왔다. 벽화 그림 한 점이 마을 분위기를 확 바꿔 살아나게 하고 있는 것이다.

 

매일 같이 노인정 문은 열렸으나 샘가 친구였던 친구들은 다 모이지 못했다. 정숙 이모는 병원 가셨고, 인숙 어머니는 집에서 출타치 않으셨다. 농악대 숫자가 줄듯 노인정 숫자도 점차 줄어들고 매화꽃만 저만치 피어 있을 것이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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